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 20세기 전반의 격동기를 뜨겁게 살다 간 독일의 여류 화가이자, 판화의 세계를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판화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선구자, 그리고 미술의 기능과 역할을 사회 속으로 제고시킨 작가. 20세기 현대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세계적인 판화가 콜비츠의 평전이 1991년 초판이 발행된 지 13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그 명성에 비해 콜비츠에 대한 제대로 된 작품집이나 서적이 전무하던 때,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케테 콜비츠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 책은, 쇄를 거듭할수록 수많은 독자들에게 그녀와 그녀의 작품세계를 알리며 사랑을 받아왔다. 아쉽게도 당시의 조악한 도판, 편집 상태 등으로 끊임없이 재출간의 요구를 받아왔던 이 책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도판의 질을 최대한 높이는 한편 초판에서의 미숙한 오류를 바로잡고 빠져 있었던 주까지 완전히 보완해 혁명적인 그녀의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데 손색이 없는 책으로 다시 선을 보인다.






















케테 슈미트(Käthe Schmidt)는 1867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dt)와 카타리나 슈미트(Katharina Schmidt)의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고귀한 품성과 신념을 가진 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당시와 같은 사회에서 공직에 있는 것은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법관생활을 청산하고 미장이의 삶을 택했을 만큼 강직한 면이 있었으며, 오빠 콘라트는 한때 사회민주주의 진영에서 명망이 높은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나는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판단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못하였다.……아마도 내가 그 분들의 도덕적 우위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그게 부담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1911년 2월의 일기 중에서)
다소 엄격하고 진지한 외가의 가풍에 대해 그는 부담을 느끼기는 했지만 존경하는 가족들의 면모를 본받으려 노력하였고, 이후 그의 작품과 행동에서는 그 영향이 적지 않음을 읽어낼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을 소중하게 여겼던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그에게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배려하였고, 그는 1884년에는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에 입학하여 슈타우퍼-베른(Stauffer-Bern)의 지도를 받으며 판화를 시작하도록 권유받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판화보다는 회화에 관심이 많아, 1888년부터 2년간 뮌헨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Herterich)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에는 회화에 몰두하였다.
1891년 여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칼 콜비츠(Karl Kollwitz)와 결혼하여 베를린의 북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남편은 의사로 일하며 무료진료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온화한 성품의 이상주의자였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그의 삶에 있어서 훌륭한 자양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조용하고 근면한 생활이 확실히 이후 나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 일기 중에서) 그리고 결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아들 한스가 태어나고, 그는 동판화와 석판화 작업을 계속하였다.
1893년 2월, 케테 콜비츠는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의 연극 [직조공들 Die Weber]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이미 진행중이던 [제르미날 Germinal] 연작을 중단하고 이후 4년간 [직조공의 봉기 Weberaufstand]의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빈곤>, <죽음>, <회의>, <직조공의 행진>, <소요>, <결말> 등 여섯 점의 판화(세 점의 석판화와 세 점의 동판화)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직조공 가족의 비참한 삶과 빈곤 속에 언제나 드리우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은밀히 모의를 한 후 거리로 나서는 직조공들, 그리고 그 결과 비극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와 남겨진 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주면서 그들의 실존과 삶의 투쟁을 근접하여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베를린에서 전시되어 성공을 거두고, 이후 시대의 사회상과 기층의 계급투쟁을 표현하는데 걸맞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주의적 형식을 발굴하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단지 연극을 본 소감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당시 남편이 일하던 진료소에는 항상 가난과 과로로 인해 병든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케테 콜비츠의 내면에 많은 자극을 주어 그로 하여금 헐벗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표정을 그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주저 앉아 있다.
"당시 나는 침머만의 [농민전쟁]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농민들을 선동하였던 여자 농부 '검은 안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떨치고 일어서는 농부집단을 대형판화로 만들었다. 이 작품에 의지하여 나는 연작을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된 이 작품에 연결되었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작업한 [농민전쟁 Bauernkrieg] 연작은 실제로 1525에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가난과 폭정에 고통받던 농민들이 거세게 일어나 투쟁하지만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비극의 장면들을 묘사하기 위해 케테 콜비츠는 긴 시간동안 숙고하고 공을 들였다. 그가 [농민전쟁] 연작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는 독일에서도 계급투쟁이 격렬하여, 사회주의자들이 사상 유례없는 선전선동으로 이 계급투쟁 과정에 참여하게 된 시기였고 그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가장 활동적인 때였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힘에 시대의 힘이 가세된 본능에 이끌려 이 시대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에게 그렇듯이 전쟁은 그의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둘째 아들 페터가 전사하면서 그는 최악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그 때부터 나는 늙기 시작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더이상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꺾여 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 아래로 가고 있나보다." (1917년 10월 12일의 일기 중에서)
이후 그는 [전쟁 Krieg]연작에 전쟁으로 인해 받은 고통을 투영하는 한 편, 인도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띠는 수많은 플래카드와 즉흥작들을 제작하였으며, [전쟁은 이제 그만! Nie Wieder Krieg!]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반전 평화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1933년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파시즘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 즉 자유주의자나 반전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의 반역자로 몰리며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이로 인해 케테 콜비츠도 자신이 속한 아카데미에서 탈퇴하도록 강요받고 작품의 전시도 금지당했다.

이 시기에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하면서도 죽음에 관한 작품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1930년대 후반에 완성한 마지막 석판 연작 [죽음 Tod]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연작은 여덟 개의 판화들로 구성되어 있고, 대가 다운 노련함과 간결한 표현수단으로,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데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1940년 남편 칼이 세상을 떠나고,1942년 큰손자 페터마저 전사하자 일흔이 넘은 나이의 케테 콜비츠는 마음 속으로 죽음을 준비한 듯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 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1944년 7월
그리고 비로소 그가 '떠나게' 된 것은 다음해 4월 22일, 종전을 불과 2주 남겨둔 봄날이었다.


















독일이 낳은 천재 여류판화가의 사랑과 분노의 자화상
20세기 초반부터 그녀의 작품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이래 그녀에 대한 논평은 아직도 멈춰지지 않고 있다. ‘콜비츠야말로 위대한 판화가다’, ‘여성으로서는 유일한 신예술 판화가다’, ‘사회민주주의 선전가다’, ‘비탄과 고난을 형상화한 화가다’, ‘종교적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등 모두 제 나름대로 취향과 감각과 지성을 동원하여 그녀를 논평하고 있으나, 누구나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예술세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단 한 번이라도 콜비츠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의 그림을 다시 보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히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살아 있는 그 감동의 이유를, 우리는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작품의 중심인 예술의 위력
1867년,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닌 가문의 딸로 태어나 26세에 첫 판화 연작 〈직조공 봉기〉를 발표한 이래, 콜비츠의 작품에는 언제나 ‘인간’이 중심이었다. 그녀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는 철저히 반대했다. 가난한 노동자, 농민, 빈민,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함께 느끼며, 함께 싸우면서 그들과 공감상태에 되어서야만, 그녀는 작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자칫 건조하고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이러한 ‘현실예술’의 분야를, 그녀는 자기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결연한 움직임과 강인한 힘의 집결로써 개척하였으며, 그 예술의 극치는 ‘통일된 힘’으로써 우리에게 강렬히 육박해온다.
훗날 그 자신도 ‘의외였다’고 말한 바 있는 그녀의 성공은, 자기 내부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야 할 필연성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수없이 반복하여 자신의 작품을 검토하였는데, 그 이유는 작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작품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필연성을 고심했기 때문이었다.
묘사된 대상에 자기를 동일화시키려는 노력, 해체되지 않은 인간의 형상을 보존해 예술적 감정과 인간적 감정이 일치되도록 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치열한 성실성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의 위력을 한껏 발휘한다.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세계
그녀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직조공 봉기〉 연작부터 초기작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농민전쟁〉 연작에서, 우리는 생동감 있게 묘사된 민중의 삶과 그 속에 녹아든 뛰어난 상상력, 섬세한 필치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민중계급에의 복무를 목표로 치열하게 활동했던 작가에는 하인리히 만, 안나 제거스, 아르놀트 츠바이크 등을 비롯해 여러 명을 꼽을 수 있지만, 케테 콜비츠만큼 노동계급 내의 민중성을 포괄하였던 사람은 없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종군한 아들 페터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용하여, 저 유명한 목판화 시리즈 〈전쟁〉 연작을 탄생시킨다. 격정적인 몸짓, 상징적으로 과장된 파토스가 깜박거리는 양각으로 처리된 이 시리즈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합리한 현실에 수긍할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더불어 공포에 마비되었던 힘과 충동이 새로이 솟아나고 있다.
콜비츠는 살아생전 숱한 반전 평화운동 작품을 제작하였다. 전쟁은 늘상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고통으로 다가왔는데, 베를린 폭격으로 피난 생활을 감수해야 했으며, 50년 살던 집이 파괴되고, 숱한 작품이 파괴되는 피해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하늘이여,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 땅 위에 또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실린 작품 〈전쟁은 이제 그만!〉은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반전 포스터이다.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연작부터 노년에 이르러 완성한〈죽음〉연작까지, 그녀의 예술에서 현실참여의 정신은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무엇인가 박탈당하고 억울한 사람들, 전쟁과 가난 같은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평등세상을 염원하는 이상세계까지, 그녀의 조형적 발언의 폭과 깊이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녀는 자기 시대에 가장 깊숙이 뿌리박고 작품을 통해 이를 발언했으나, 나중에는 그녀를 통해 역사가 말을 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녀의 예술이 매우 감각적이라는 사실인데, 그녀는 흰색과 검은색만을 사용하는 판화에서 딱딱한 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광선에 의한 명암의 대비만으로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콜비츠의 판화는 비할 바 없이 풍부하고 투명한 내면의 빛으로 비추어져 있고, 어떤 색채 그림보다 다채롭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노동자 빈민층의 현실묘사라든가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소재가 많았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특히 1백 점도 넘는 자화상을 통해 콜비츠는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빗대어 내면풍경을 형상화했는데, 이 자화상들은 그 시대에 대한 답변이자 증언으로써,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드러내는 기둥으로 우뚝 서 있다.

지구상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판화―케테 콜비츠
그녀가 개척한 ‘현실예술’ 양식은 중국에서 신흥목판화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1980년대 한국의 민중판화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 예술인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녀는 삶과 작품이 분리되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작품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즉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전통과 특정한 사회적 출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겪었던 것들을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 자전적이며, 거기에는 예술과 삶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 세계에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운 판화를 남겨놓은 케테 콜비츠의 삶은, 지구상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판화이다.

지은이 카테리네 크라머는 그녀가 남긴 일기, 서한집, 작품집, 그밖에 카탈로그에 실려 있는 논평들과 논문들까지 모두 집대성하여 가장 훌륭한 케테 콜비츠의 평전을 완성했다.
이 책에는 그녀의 육성을 비롯해 작품의 동기가 되었던 내면풍경과 세계관,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자세가 밀도 높게 녹아들어 있으며, 〈직조공 봉기〉, 〈농민전쟁〉, 〈전쟁〉, 〈프롤레타리아트〉, 〈죽음〉에 이르는 연작 시리즈의 주요 작품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작 70여 점이 수록되어 있다.

예스24 제공



지은이 소개

카테리네 크라머

카테리네 크라머
1937년 동프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으며, 옥스퍼드, 뮌헨, 파리에서 사회학, 문학, 예술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파리에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리하르트 데멜과 앙리 알베르가 주고받은 편지 모음과 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의 편지 모음 등 두 권의 서한본을 준비 중이다.

by 스태파노 | 2006/01/04 13:24 | - ∴Character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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